장년기
일제 말기 : 2차 세계대전도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전시 체제의 강도 높은 규제와 핍박 등으로 목재사업도 위기를 맞게 되어 동명제재소도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문을 닫는 시련도 겪었으나 워낙 근면·성실한 데다가 그의 사업적 예견으로, 가구공장이 밀집한 지역 가까이에 제재소를 차리면 판자와 각목의 주수요자인 가구공장에 자재를 신속히 공급할 수 있게 되니 수요자나 공급자 피차간에 시간과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利點)과 동시에 다른 업체와의 경쟁력에서도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맞아 떨어져 제재소의 사업은 비교적 순조로이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이 조그만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의 성장·발전을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제2의 도약을 꿈꾸면서 현 제재소의 규모 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련한 범일동의 새 부지에 공장을 짓고 생산시설 공사를 진행해 나가던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강석진 회장은 새로운 결심과 각오로 새 공장을 이전 설립하고 지금까지의 제재사업뿐만 아니라 합판생산을 위한 기계시설 설비 체제를 갖추면서 상호도 동명목재상사(東明木材商社)로 바꾸어 본격적인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합판생산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이유에서다. 첫째, 원자재 효용의 극대화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원자재가 되는 원목은 강원도의 산림이나 함경도 백두산의 수림에서 벌목해 온 것과 일본에서 벌채된 원목을 썼으나 해방이 되고 또 우리의 국토가 38선으로 양단되자 원목을 구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규격에 맞는 판재(板材)나 각목을 켜낸 뒤에 남는 자투리나 토막은 화목으로밖에 쓸모가 없어 자원의 손실과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합판을 만들면 이런 자투리 토막까지도 다 제품의 자재로 쓰이기 때문에 낭비도 막고 원가 절감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결국 원자재 효용의 극대화는 곧 그의 절약정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연구와 개발정신의 발현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건축자재로써 합판은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판재가 귀하고 각목이 모자라다 보면 자연히 새로운 대체 자재의 수요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 그때를 대비해서 제조기술과 생산공정을 연구·개발하여 질 좋은 합판을 만들어 내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계산과 예견은 적중하였다. 해방정국의 혼란과 무질서한 사회정세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업체가 위기를 맞는 가운데 특히 공장의 이전과 시설설비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서 종국에는 운영 자금마저 고갈되어 동명목재상사는 극도의 위기국면을 맞았으나 그의예견은 현실화되어 합판의 수요가 차츰 늘어나게 된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머지 않아 민족의 대참화 6.25가 발발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성립으로 만 3년 1개월 전란의 포성이 일단 멎었으나 우리는 전쟁으로 초토화 (焦土化)된 조국의 재건과 전후복구의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었다. 재건과 복구는 건축경기의 활성화를 뜻하는 것으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동명목재상사 200여 종업원은 수요를 제때 맞추느라 밤을 낮으로 삼으면서 제품생산에 한눈 팔 겨를을 가질 수 없었다. 일찍이 범일동으로 공장 이전 후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를 쯤 뜻하지 않는 화재로 시련을 겪기도 하고 1959년, 유명한 사라호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강석진 회장 특유의 불굴의 의지와 난관과 애로를 거뜬히 뛰어넘고 헤쳐내었으며, 이리하여 동명목재상사의 사세는 날로 확장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의 장년기는 출세(出世)의 시기로써 장래의 대성을 눈앞에 바라볼 수 있게 된 시기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