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쓰린 주림을 참아가면서 푼푼이 아껴 모은 돈이 자그만치 400원이었다. 1920년대 초기, 당대의 화폐가치로 따져볼 때 400원이란 돈은 가난한 서민은 좀채 만져보기 어려운 큰 돈이었다. 빈손 으로 부산에 발을 들인 소년 강석진의 처지로 보자면 이 400원은 막대한 거금이 아닐 수 없다. 눈물과 피땀어린 돈 400원을 밑천으로 하여 내 손으로 내 사업을 경영하여 돈을 벌겠다는 절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 동명제재소의 설립이었다.
동명제재소를 차려 10여 명의 종업원을 채용하여 사업을 시작한 그는 이제 한 사람의 어엿한 사업주요, 고용주이면서도 그 자신이 목공 기술자이기에 종업원들과 함께 옷소매를 걷어부치고 손수 원목을 켜서 판자와 각목을 만들어 내고 직접 톱질 대패질은 물론 못질을 하면서 주종이 일심동체가 되어 부지런히,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목재와 가구를 만들어 내었다. 그 결과 동명재제소에서 만들어 낸 목재의 품질이 우수하고 가구제품이 섬세하고 미려하면서도 실용적이고 견실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부산 일원은 말할 것도 없고 경남·북 지방 일대에서도 목재와 가구 제품의 주문이 쇄도하였으며 따라서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사업이 번창해 감에 따라 지금의 제재소로는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공장의 이전 확장을 염두에 두고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부지를 사 그곳으로 옮기려 마음먹고 땅주인을 찾아갔으나 땅주인은 막무가내로 애초부터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이 이루어 내고야마는 것이 그의 성품인지라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고 하루에도 몇 차례를 찾아가 조르고 설득하고 때로는 부탁하고 애원하며 찾아다니기를 3년 만에 요지부동이던 일본인 땅주인도 그의 지치지 않는 끈기와 인내, 집념과 열성에 감복한 나머지 결국 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사들인 공장부지가 지금의 광무교 아래를 흐르는 동천(東川)변 동쪽 부산진구 범일동 862번지 일대의(부산교통공단) 땅이다.
이때 강석진 회장은 서른을 갓넘긴 청년 실업가로서 이미 개성(開城) 고씨(高氏) 장호(長湖)님의 둘째 따님 고화(古華) 규수를 아내로 맞아 슬하에 1남 2녀를 둔 단란한 가정의 자상한 가장이기도 하였다.
그의 청년기는 곧 그의 입지기(立志期)이기도 하였다